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 국민당/역사 (문단 편집) == 국공내전의 재발과 3당 훈정의 출범 == 전후에는 [[중국 공산당]] 및 중국 민주 동맹과 함께 논의한 협상이 결렬되고 [[국민혁명군]]을 동원해 총공세에 나서면서 [[국공내전]]이 재발한다. [[중국 국민당]]은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을 초청하면서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여당/무소속/직업단체의 직선으로 선출한 '제헌' 국민대회를 1946년에 소집했으며, [[중화민국 헌법]]을 반포하면서 다당제 헌정으로 전환했는데, 1947년에 여당/야당/무소속/직업단체의 직선으로 선출해 소집한 '행헌' 국민대회/'행헌' 입법원/'행헌' 감찰원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참정을 거부하면서 중국 국민당(大)/중국 청년당(中)/중국 민주 사회당(小)의 여대야소를 자연스럽게 연출했으니, 장제스의 책략으로 '3당 훈정'을 형성했다. 여기서 '3당 훈정'은 강력한 총통제와 3개 정당의 연립내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헌정(憲政)과 실질적인 훈정(訓政)을'''을 동시에 추구하는 1946년 체제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1946년에 장제스는 3당 훈정의 막후 공작을 추진하면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을 차례로 초청하여 최고위급 관직에 등용을 약속했고, 곧이어 3당 훈정의 여당으로 변신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은 연립내각의 여당으로서 중앙정부의 장차관으로 출세했지만, 그들의 표밭은 어디까지나 중국대륙의 대도시에 한정되어 있었다. 결국 1949년부터 1950년까지 국공내전의 패전으로 중화민국이 중국대륙의 99%를 상실하면서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은 지지세력의 99%를 잃어버렸다. 중화민국의 중앙정부가 타이베이로 천도하면서 3대 정당들의 본부도 타이완 섬으로 이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